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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자기애에 대하여

“날 추앙해요.
나는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난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날 추앙해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미정의 대사 중-
저는 한동안 <나의 해방일지>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날 추앙하라는 미정의 말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애정 결핍으로 사랑에 구걸하는 이상한 여자의 헛소리 정도로 들리시나요?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정은 타인을 깊이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하고 의젓한 캐릭터입니다. 이런 대사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죠. 그런 미정이 왜 알콜중독인 구씨에게 사랑도 아닌, 추앙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걸까요. 여러 심리학 이론이 있겠지만 하인츠 코헛의 <자기심리학>의 렌즈로 미정을 이해해 보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정의 추앙 요구는 인간의 깊은 ‘자기애’적 요구라 볼 수 있습니다.
‘자기애’란
그러면 미정이 나르시스트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자기애(narcissism)에 대한 유래부터 살펴볼께요. 자기애는 고대의 나르수스 신화에서 유래합니다. 물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진 나르수스.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 채 오직 자신과만 사랑에 빠진 나르수스는 물 속에 비친 자신만 쳐다보다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이처럼 ‘나르시즘’은 나르수스 신화에서 유래되긴 했지만 심리학 이론에 따라 해석과 처방이 다릅니다. 정신분석이론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병리적인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프로이트는 성적 본능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에너지라 생각했어요. 그 에너지를 ‘리비도’라 불렀는데 인간의 리비도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향하다가, 성장하면서 리비도는 타인을 향한다고 봤죠. 이 때 타인을 향해야 할 리비도가 외부 환경에서 좌절이나 상처를 받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에게 향해야 할 리비도를 철수하여 다시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다고 해석했어요. 이런 사람은 자기애적인 사람이 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미숙하고 병적인 현상으로 해석하고, 자라면서 포기해야 할 욕구로 바라본 것이죠.
그러나 자기애를 이와 다르게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한 정신과의사가 있었습니다.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자기애에 대한 관점을 프로이트와 다르게 해석했어요.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이 질문에 코헛은 유아가 엄마와 하나를 이루었던 그 시기를 인간이 가장 완벽하게 행복한 상태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깊은 무의식에서는 성인이 되더라도 완벽한 ‘나’, 완벽한 ‘엄마’와의 융합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죠. 코헛은 엄마와 하나로 연결된, 완벽하게 행복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욕구를 ‘자기애’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평생 지속된다고 생각했어요. 자기애적 욕구는 포기되거나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건강한 형태로 변형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라 봤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발전한 심리학이 하인츠 코헛의 <자기심리학>입니다.
날 추앙해 달라는 미정의 욕구는 자기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늘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 맞추느라 텅 비워져 버린 자신을 채워달라는 무의식에서 터져 나오는 자기애적 욕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사랑으로 양육하는 엄마에게도 자기애는 있습니다. 엄마들도 누군가의 추앙을 받아야 아이들을 추앙해줄 수 있는 건강한 나, 건강한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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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애적인 시대, 자기애적인 부모와 아이들
지금은 자기애적 시대입니다. 인간의 자기애적 욕구가 정당화되며, 어쩌면 자기애가 과잉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반인들도 자기애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애적 성격을 가진 사람을 ‘나르’라고 호칭하며 이들에 대한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나르시스트를 구별하는 법, 나르시스트에게 대응하는 법, 나르시스트 다루는 법 등등. 그런데 이런 콘텐츠들은 나르시스트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자기애성 성격장애에 해당될 정도로 자기애가 병리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은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자기애적 욕구가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 역시도 자기애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코헛에 따르면 자기애는 평생 건강하게 발달시켜야 하는 욕구이지 배제되어야 할 욕구는 더더욱 아니지요. 철저하게 나르시스트를 구별시키는 콘텐츠야말로 오히려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질 수 있는 자기애적 콘텐츠는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병리적 자기애의 대표적 특징은 자신이 자기애적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까요.
미정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미정은 경기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3남매 중 막내로 자랐습니다. 부모님 농사일도 돕고, 형제들에게도 늘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아왔던 착한 미정. 부모님의 성정으로 보아 미정은 유아가 가질 만한 마땅한 자기애적 욕구마저도 충족되지 못한 채 성숙함을 요구받고 자랐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뭘 해도 예쁘고 최고라 여김 받는 어린 시절을 보내진 못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다보니 미정은 자기애적 욕구를 꼭꼭 숨기고 억압해야 했을 겁니다. 성인이 되어 만난 남자친구들은 모두 개새끼. 미정은 그들에게도 부모님을 대하듯 자신의 욕구는 외면한 채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랑을 했습니다. 사랑도 주고, 돈도 주고. 그러다 더 이상은 자신을 이렇게 대우하는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오게 됩니다. 알콜 중독으로 겨우 겨우 삶을 이어가는 구씨에게는 꼭꼭 억압해 두었던 자기애적 욕구를 처음으로 드러냅니다. 나도 사실은 가득 채워지고 싶다고 말입니다. 다른 이들을 채워주는 삶을 살았던 미정이 한 말이기에 추앙해달라는 그녀의 요구는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우리의 자기애적 욕구와도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추앙 열풍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자기애적 욕구에 대한 방증 아니었을까요.
엄마의 건강한 자기애를 위하여
엄마에게도 자기애가 있습니다. 엄마에게도 자기애가 있다는 말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엄마’라는 단어에서 전통적으로 요구되는 이미지는 대체로 희생, 배려, 양보 같은 이타적인 이미지죠. 엄마의 자기애적 욕구는 프로이트의 관점처럼 엄마가 되면 버려야 할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코헛의 관점에 따른다면 엄마에게도 자기애적 욕구는 있습니다. 그것도 평생을 통해 건강하게 발달시켜야 하는 욕구죠. 예전처럼 전통적 성역할이 사회 전체적으로 요구되고 강압되었던 시대와는 달리 이 시대의 엄마들은 자기애적 욕구가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엄마로부터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엄마들은 자신의 자기애적 욕구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엄마가 자기애적 욕구를 잘 다루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에게 자신의 자기애적 욕구를 투사하기 쉽죠. 융이 말했듯 자녀에게 부모 내면의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도록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됩니다. 좋게 말해 부모가 자녀에게 꿈꾸고 기대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부모가 자기애적 욕구를 자녀에게 투사하는 것이며, 심한 경우는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엄마는 자녀가 아닌, 다른 대상을 통해 건강하게 자기애적 욕구를 채울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대상’은 반드시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자연, 취미, 운동…성숙할수록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의 자기애적 욕구를 채울 대상으로 활용할 수 있어요. ‘나’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가꾸어 나가는 일이나 취미, 이를 통해 확장되는 관계가 꼭 필요한 이유죠.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가 ‘추앙’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을 때 미정은 대답했습니다.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자신을 자녀에게 날마다 떼어주어야 하는 엄마들에게도 그런 응원이 필요합니다. 엄마가 된 이후 ‘나’ 를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을 때 ‘너 자신을 잃지 않아도 된다’, ‘새롭게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응원이 필요합니다. 때론 의심이 갑니다. 엄마 자신의 자기애적 욕구를 이렇게 채워갈 때 결국 이기적인 엄마가 되어가고, 자녀들 역시 그런 엄마의 모습을 닮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미정과 구씨를 생각해 볼까요? 처음에 미정이는 자신을 추앙해 달라는 요구부터 시작했지만, 구씨의 질문으로 자신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구씨는 ‘넌 누굴 추앙해 본 적 있냐?’ 고 묻죠. 지하철을 기다리며 그 질문을 한참동안 생각한 미정은 그 다음날 구씨에게 ‘내가 추앙해 줄까요?’라고 물어봅니다. 그때부터 구씨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응원을 보내지요. 자신의 깊은 욕구를 제대로 마주본 사람은 그 욕구가 결핍된 다른 이도 그 욕구가 채워져야 함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대상이 되어주는 자신의 욕구도 채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지요. 미정과 구씨는 그렇게 서로를 채워갑니다. 서로를 추앙하면서.
구씨가 없어도 우리는 스스로를 채울 수 있습니다. 돌볼 수 있어요.
<마주봄 질문>
엄마가 된 이후에도 당신은 채워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