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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의 좌절이 성장하게 만든다

공감만 있는 세상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는 ‘적절한 애착손상’이 필요하다 애착손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애착손상이 심각한 것만큼 문제가 될 수 있다. ‘적절한 애착욕구의 좌절’은 세상을 헤쳐나갈 독립심을 주고,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 상호적인 관계를 맺어갈 기초가 되고, 대상의 좋은 면과 안 좋은 면을 바라보고 통합할 수 있는 시야를 준다. 좌절은 발달의 중요한 요소다 -문요한 <관계를 읽는 시간>
서로를 온전히 공감하는 세계가 가능할까요? 안타깝게도 공감으로만 가득한 세상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어느 부분에서는 공감 받지 못하고,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리는 언제 처음 좌절을 경험했을까요. 아마도 인생 첫 좌절의 순간은 아기가 엄마 뱃 속에서 태어나는 순간일 겁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엄마 몸 안의 세계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의 첫 분리불안은 시작됩니다.
태어나서 6개월 정도는 엄마와 아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태내 경험의 여파가 서로에게 남아 있습니다. 엄마와 아이는 서로의 모든 신호에 주파수를 맞추지요. 소아과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마가렛 말러는 병원에서 많은 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관찰한 결과 출생 후 4-5개월까지는 엄마와 아이가 ‘심리적 공생’ 관계에 있다고 했습니다. 엄마와 아이는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융합의 경험을 하는 유일한 관계예요. 그래서 아이에게 이와 같은 심리적 공생, 융합의 경험은 공감의 토대를 이룹니다.
아이가 신체적인 이동을 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엄마와의 물리적 근접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에 따라 엄마의 모성몰두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들면서 아이는 점차 심리적인 분리와 개별화를 시작하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분리와 개별화라는 정상적 발달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엄마의 공감적 반응이 오히려 실패하는 순간들도 점차 쌓여갑니다. 엄마가 오랜만에 수다를 떠느라 아이가 배고프다는 소리에 즉각 반응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엄마는 회사 복귀를 준비하면서 아이에 대한 안테나를 잠시 끄면서 아이가 졸려서 우는 건데도 배고파서 우는 줄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이가 개별적 주체가 되어 감에 따라 좌절의 순간들이 쌓여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좌절은 트라우마가 되어
이렇게 경험하는 크고 작은 좌절에 대해 코헛은 견딜 수 있는 좌절과 견딜 수 없는 좌절로 구분합니다. 견딜 수 있는 좌절인지 그렇지 않은 좌절인지는 어떻게 구별될까요.
아이가 분유를 달라고 하지만 물이 데워지지 않아 아이를 오래 걸리게 할 때 아이를 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야, 너무 배고프지? 지금 물이 데워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이제 거의 다됐어~~” 하며 아이의 불안을 달랩니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게 늦어졌다면 “~~야 엄마가 늦어져서 미안해~~ 엄마가 보송보송하게 닦아줄께.” 하며 아이 몸도 주물러주고 엉덩이에 부채질까지 해준다면, 아이의 좌절은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 엄마가 불안을 진정시키고 달래는 태도에 따라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즉각 실현되지 않아도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어떨까요? 기저귀가 젖어 불편해서 아무리 울어도 누구도 오지 않는다면, 몸이 아프거나 감각에 예민해서 울음으로 표현하지만 그럴 때마다 부모가 소리를 지르거나 때린다면, 아이에게 그 좌절은 견딜 수 없는 경험이 됩니다. 트라우마(외상)로 남게 되지요. 즉 아이의 좌절에 대한 엄마의 태도에 따라 그 좌절은 견딜 수 있는 좌절이 되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좌절이 되기도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견딜만한 좌절=최적의 좌절
코헛은 견딜만한 좌절을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이라 개념화했습니다. 양육자가 아이를 공감적으로 양육하지만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는 좌절 경험은 최적의 좌절 경험이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최적의 좌절 경험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경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양육자가 최대한 공감적으로 양육하려 하지만 자신의 불가피한 한계로 인해 아이가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소극적 의미의 좌절 경험이라 할 수 있어요. 엄마들마다 자신이 공감적으로 반응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고, 아이들의 기질 역시 다르기 때문에 엄마와 아이 간에 상호 조율되는 정도에 따라 최적의 공감 또는 최적의 좌절 경험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입장에서 좌절의 경험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양육자가 아이를 진정시키고, 불안을 달래며, 아이가 경험하는 감정에 공감하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그것이 설사 어설프고 둔탁하더라도 아이는 부모의 태도를 민감하게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때론 엄마 자신보다 엄마를 더 잘 알고 있어요.
신기하게도 좌절은 아픈 경험이지만 인간은 좌절로 인해 성장합니다. 그것이 최적의 좌절 경험이었을 때 아이의 자기애는 건강하게 발달하면서, 단단하고 응집된 ‘나’의 심리적 구조를 만들어 갑니다.부모가 나름의 최선을 다해 아이를 공감적으로 양육하지만 불가피한 한계로 인한 좌절이 발생했을 때 아이는 자신의 살 길을 찾습니다. 아기일 때 스스로 해줄 수 없었던 심리적 기능, 자신의 불안을 달래고 진정시켰던 부모의 기능을 이제는 스스로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좌절 경험이 오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불안을 달래지 않더라도 자신이 진정시킬 수 있는 ‘자기(self)’ 구조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가 심리적으로 밥을 떠먹여 줬다면 이제는 스스로 심리적인 밥을 짓기 시작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성인이 되어서도 좌절을 경험했을 때 회복탄력성이 매우 떨어지거나 우울 또는 불안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 견딜 수 없는 좌절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자신의 좌절과 불안을 위로 받거나 진정 받은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도 자신 스스로를위로하고 진정시킬 능력이 떨어집니다. ‘나’의 심리적 구조가 취약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한편 아이가 정서적으로 하나도 결핍을 느끼지 못하도록 과잉 보호를 했다면 어떨까요. 그런 경우엔 스스로 밥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겁니다. 스스로 집을 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죠. 양육자가 늘 밥을 떠먹여주고, 고장난 내 집도 수리해줬기 때문에 내가 그 기능을 스스로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나를 돌보고 나를 진정시킬 능력을 키우지 못한 채 자라는 거죠. 정서적 과잉 공감은 오히려 아이를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강박적으로 공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양육을 한다면 아이는 잘 자라갈 수 있습니다. 공감이나 애착에 실패해도, 다시 복구하면서 ‘나’의 심리적 구조를 만들어가면 됩니다.
엄마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참고문헌>
홍이화 <자기심리학 이야기1>
아들의 중간고사 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