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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을까

‘나’의 발달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된 걸까요? 성격, 대인관계 스타일, 직업, 취향, 가치관, 감정…’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독특하고 고유합니다. 코헛은 ‘자기(self)’(여기에서 ‘자기’는 자아와 달리 대상과 구별되는 한 개인 자신의 전체 인격을 말해요. 이하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나’라고 통칭할께요)가 발달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했어요.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다보면, 엄마와 아기만 존재하고 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는 내가 울면 젖을 오고, 기저귀가 젖어 있으면 보송보송한 새 기저귀로 교환되어 있고, 안기고 싶으면 안겨 있는 마냥 행복한 시기입니다. 그렇지만 ‘나’를 느끼지는 못해요. 생애 초기의 아기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엄마 뱃 속에 있는 10개월의 기간이 세상에 태어나 일정 기간은 엄마와 나를 마치 하나의 존재처럼 생각하지요. 엄마를 통해서야 비로소 ‘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기는 착각을 해요. 자신이 울면 젖을 주는 존재가 엄마라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마치 젖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젖은 기저귀가 새로운 기저귀로 바뀌는 이런 전능한 상황을 자신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이렇게 내가 원하는 걸 바로 만들어 내는 자신은 완벽한 존재요,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엄마라는 대상도 완벽한 존재로 느낍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요? 아기에게 모든 게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안타깝게도 길지 않아요. 엄마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젖을 달라고 할 때 젖을 주지 못하고, 때로는 기저귀가 젖었지만 전화를 하느라 새로운 기저귀로 빨리 갈아주지 못할 때도 있지요. 유아는 자라면서 점차 크고 작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크고 작은 좌절을 경험하지만 유아는 엄마와 하나로 연결되어 전능감을 누렸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완벽한 ‘나’, 완벽한 ‘엄마’의 상태를 복구하고 싶어합니다. 코헛은 이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자기애’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자기애적 욕구로 인해 ‘나’는 전능감, 과대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과대자기’의 측면으로, 한쪽은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완벽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는 ‘이상화 부모 이마고’의 측면으로 발달합니다. 즉 우리 안에는 모두 “나는 완벽해”와 “당신은 완벽해. 그리고 나는 당신의 일부야.”라는 자기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유치하게만 보이는 이 자기애적 욕구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 안에 있을 겁니다. 다만 그 욕구를 건강하게 발달시켰는지 아닌지가 다를 뿐이죠. 나는 얼마나 완벽하고 싶었을까요. 그리고 완벽한 누구와 그토록 연결되고 싶었을까요?
코헛은 이런 과대자기와 이상화 부모 이마고의 자기애적 욕구가 유아 시절 충분히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교적 사상의 잔재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예의와 겸손 등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런 코헛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유교적 사상이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요. 유교적 사상이 ‘나’를 설명해 주긴 어렵기 때문이죠. 탈중앙화, 개인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코헛의 자기심리학으로 설명되는 심리적 현상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코헛은 유아의 전능감과 과대감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어린 시절 그 욕구가 충분히 존중 받은 어른은 자기애적 욕구를 성숙한 방법으로 스스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자기애적 욕구를 존중 받지 못했다면 ‘나’의 구조에 결핍이 생깁니다. 자기애적 욕구는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무의식에 깊이 억압되고 차단되지요. 성인이 되어서도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어린시절의 미성숙한 자기애적 욕구가 조절되지 못한 채 불쑥 불쑥 튀어나옵니다. 어른이 되었지만 자신을 너무 과장하거나 이상화한 대상과 밀착되려 한다면, 그에겐 아마도 존중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위 나르시스트인 사람들은 지나친 자기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자기결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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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전능감, 과대감에 대한 건강한 어른의 반응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 에서는 전능감, 과대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어린이들에 대한 선생님의 근사한 반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겠다며 호언장담하는 어린이, 옥스퍼드에 유학을 가게 되면 영어에 더 익숙해서 선생님과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어려울까봐 걱정하는 어린이, 국가대표 농구선수가 될꺼라는 꿈을 가진 아이가 농구를 갓 해본 선생님을 짠하게 생각하는 어린이까지. 어린이들의 귀여운 전능감과 과대감을 선생님을 참으로 귀하게 여겨 줍니다.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어린이의 허세를 기꺼이 허용해주고 어린이의 부풀리기를 성장의 선언으로 보아주는 선생님의 시선은 따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을 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그 욕구가 좌절되고 꺾였을 뿐이죠. 그 욕구를 어린 시절 꿈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어린 시절 꿈 뿐일까요. 지금이라도 내 마음 속에 품은 그 꿈을 기꺼이 인정해 주고 멋있게 바라봐 주는 대상이 우리 인생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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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을까
엄마가 된 지금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자주 사로잡힌다면, 그래서 우울하고 공허해질 때가 많다면 한번 돌아보세요. 나는 어린 시절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는지.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한 조각도 나지 않는다면 자기애적 욕구는 무의식속에 꾹꾹 억압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앞으로 더 나아가야 되는 순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해야 되는 순간 어린 시절 억압되었던 자기애적 욕구는 갑자기 고개를 들 수 있어요. 이런 내 욕구를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지만 그런 대상을 만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수치심과 격노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자기애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완벽해지려 노력하고 노력하다가 결국 번아웃이 오기도 하지요. 그 욕구를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워 자녀에게 투사했을 때 자녀는 그들 자신의 인생을 살기가 너무나 어려워집니다.
자녀가 짊어져야 할 가장 큰 짐은 부모 내면의 ‘살아보지 못한 삶’이다. - 칼 구스타프 융
그러니 지금이라도 알아차리는 게 필요해요. 나는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는지. 자라고 싶었지만 어디에서 좌절되었는지를. 자기(self)가 발달되었던 경로를 추적하다 보면 지금 내가 우울하고 불안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녀의 잘못으로만 화가 날 때도 있겠지만, 자녀를 통해 좌절되었던 내 모습을 보기 때문에 화가 날 때도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왜 이렇게 우울한지, 불안한지 모르겠다면 아직 의식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답은 무의식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살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어린 시절 무의식 안에 잠궈 놓은 것들을 열어보는 심리 여행이 필요합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영역이 커질수록, 우리는 무의식적 반응으로 살지 않고, 의식적 결정을 통해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이해가 필요한 실질적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