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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주본다는 건

엄마로 살아가면서 나와 마주한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나와 마주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마주본다는 건 나와 구별된 대상,
타인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니 나를 마주본다는 건,
나를 마치 타인처럼 바라봄을 의미합니다.
심리학 이론에서는 자기(self)를
경험적 자기와 관찰적 자기로 구분하기도 해요.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경험하는 내가 있고,
경험하는 나를 관찰하는 내가 있다는 거죠.
나를 마주본다는 건,
관찰적 자기가 되어본다는 의미입니다.
메타인지, 자기성찰 같은 개념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성숙한 기능이죠.
그저 그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
바깥에서 나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나와의 마주봄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바깥에서 나를 관찰해 보는 겁니다.
유체이탈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엇을, 누군가를 경험할 뿐이죠.
내가 의식하는 세계 그 이상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반응할 뿐입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나를 관찰하려면 ,
내 무의식의 세계를 알아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은 다른 사람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J.W.괴테)”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부모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가 최초로 만나는 타인은
엄마입니다.
엄마인 우리는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그럼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엄마로 살아가면서 나와 마주본 적이 있나요?”
엄마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아이로 인해
희노애락오욕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 중에는 내가 이해하는 나의 감정도 있지만
나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와서
나 자신과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내가 이해하는 나의 감정은
내가 의식하고 있는 감정입니다.
나도 이해할 수 없고 조절하기 어려운 나의 감정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나의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감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엄마로 살아가면서 제대로 나를 마주하려면
무의식의 세계에 접촉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이라는 대상과,
심리학 이론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말이죠.
tvN <금쪽 같은 내 새끼>에 나온
부모들을 관찰해 보신 적이 있나요?
오은영 박사와 몇몇 연예인들 앞에서
부모들은 잔뜩 긴장합니다.
사랑하는 아이의 문제는 대부분
부모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들은 죄인의 심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표정, 몸짓까지 경직되어 있던 부모들이
무장해제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오은영 박사가 그들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는 순간,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마주볼 수 있었습니다.
부모 역시도 금쪽이임을,
부모도 그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싶은
어린 아이의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거죠.
그 모습을 상담자가 알아줄 때 그 부모 역시
공감을 경험하고 공감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갑니다.
엄마이기 이전에도 나의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나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엄마가 된 이후에는 아이를 키우며
나의 어린 시절에 억압해 놓은 감정들이
더 자주 자극될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낼 때도 많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들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다시 꾹꾹 억압하거나 아이에게 투사된다면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니 엄마로서 나를 마주본다는 것은
나 자신과 아이 모두를 살리는 과정입니다.
엄마로서 나와 마주하는 것은
때로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나의 어두운 그림자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다 보면
이전에 보지 못한 나의 사랑스러움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조금만 용기를 내세요.
반짝거리는 나의 빛과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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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
엄마로 살아가면서 나와 마주한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나와 마주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마주본다는 건 나와 구별된 대상, 타인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마치 타인처럼 나를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해 보셔도 좋습니다. 어떤 심리학 이론에서는 자기(self)를 경험적 자기와 관찰적 자기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는 감정을 경험하는 나와, 경험하는 나를 관찰하는 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를 마주본다는 건, 관찰적 자기가 되어본다는 의미입니다. 메타인지, 자기성찰 같은 개념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성숙한 기능이지요. 그저 그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 바깥에서 나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나와의 마주봄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바깥에서 나를 관찰해 보는 겁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거의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엇을, 누군가를 경험할 뿐이죠. 내가 의식하는 세계 그 이상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반응할 뿐입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나를 관찰하려면 , 내 무의식의 세계를 알아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은 다른 사람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J.W.괴테)”
나를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부모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가 최초로 만나는 타인은 엄마입니다. 엄마인 우리는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대상입니다.
그럼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엄마로 살아가면서 나와 마주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엄마로 살아가면서 아이로 인해 희노애락오욕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내가 이해하는 감정도 있지만 나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와 나 자신과 아이를 고통스럽게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감정은 내가 의식하고 있는 감정입니다. 나도 이해할 수 없고 조절하기도 어려운 감정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나의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감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엄마로 살아가면서 제대로 나를 마주하려면 무의식의 세계에 접촉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이라는 대상과, 심리학 이론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말이죠.
채널A <금쪽 같은 내 새끼>에 나온 부모들을 관찰해 보신 적이 있나요? 오은영 박사와 몇몇 연예인들 앞에서 부모들은 잔뜩 긴장합니다. 사랑하는 아이의 문제는 대부분 부모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들은 죄인의 심정으로 내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표정, 몸짓까지 경직되어 있던 부모들이 무장해제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오은영 박사가 부모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순간,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마주볼 수 있었습니다. 부모 역시도 금쪽이임을, 그들도 그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싶었던 어린 아이의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거죠. 이런 모습을 상담자가 알아줄 때 그 부모도 공감을 경험하고 자녀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갑니다.
엄마이기 이전에도 나의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나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엄마가 된 이후에는 아이를 키우며 나의 어린 시절에 억압해 놓은 감정들이 더 자주 자극될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낼 때도 많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들이 이해받지 못한 채 다시 꾹꾹 억압되거나 아이에게 투사된다면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큰 상흔을 남깁니다.
그러니 엄마로서 나를 마주본다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과 아이 모두를 살리는 치유의 과정입니다.
엄마로서 나와 마주하는 것은 때로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나의 어두운 그림자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다 보면 이전에 보지 못한 나의 사랑스러움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조금만 용기를 내세요. 반짝거리는 나의 빛과 만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