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Duplicate

공감보다 공감의 복구

공감적 근사치면 족하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것이다. 그것인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사실 기적이다. 스스로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프랑스 작가, 시몬 베유/ 로젠버그 <비폭력대화> 중 인용-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저는 동의합니다. 정확한 공감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와 다른 존재에게 정확하고, 완벽하게 공감할 가능성이 애초에 얼마나 될까요. 정확한 공감, 완벽한 공감이라는 건 어쩌면 이상적인 기준일지 모릅니다. 정확한 공감이라는 말은 때론 우릴 더 숨막히게 만듭니다. 특히 내가 부모로부터 많은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공감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도 어렵고, 공감을 하고 싶어도 나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무엇을 주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정확한 공감을 주기 위한 “태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정확한 공감을 주었느냐 못 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감적 “태도”가 건강한 ‘나’를 발달시켜 나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거죠. 자기심리학을 발전시킨 코헛 역시 ‘공감적 근사치’에 만족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를 궁금해 해주고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들으려 하는 존재 그 자체가 어쩌면 공감이 아닐까요.
정확한 공감보다 공감의 복구
심리학을 공부하고 나서부터 공감의 위력을 알고 있었지만 전 아이들에게 공감해 주기가 참 어려웠어요. 공감하면 아이들이 저에게 조잘조잘 이런 저런 얘기를 잘 털어 놓는다는 걸 경험했지만 지속해주기가 어려웠습니다. 성과 중심적으로 양육되었고 살아왔던 저에게는 아이들이 목표와 성과 중심적 태도를 보이지 못할 때면 답답했어요. 그 주제가 제 삶의 핵심주제이기도 해서 같은 주제에서 늘 걸려 넘어졌답니다. 공감마저도 어쩌면 저는 성과를 내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아이에게 공감해주지 못하고 또 이전 관성대로 대할 때면 엄마로서의 무능감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러다 한 교수님의 강연 내용 중 한 마디가 저를 자유하게 했습니다.
“공감의 미스매치는 늘 일어난다.”
애착 연구가들이 수많은 엄마와 아이의 쌍을 관찰해 본 결과, 안정애착 관계인 엄마와 아이 사이에서도 엄마는 30초에 한번은 아이의 표정을 잘 읽지 못해 미스매치가 일어난다고 보고하고 있어요. 이 때 중요한 건 아이의 표정을 제대로 읽지 못한 엄마가 “아~ 배고픈게 아니었어? 졸린다는 거였구나~ 엄마가 몰랐네. 이제 자장가를 불러줄까?”라며, 이렇게 아이와의 정서를 다시 한번 조율하는 복구 작업을 먼저 시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코헛도 상담 장면에서 역시 치료자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 특히 공감상의 착오를 인정하는 것, 공감의 결렬과 복구 작업이 더 치료적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요. 엄마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최선의 공감을 전하려 해도 엄마 자신의 태생적 한계로 매번마다 정확한 공감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때론 공감적 근사치도 전하지 못할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차라리 공감하는 걸 포기해야 할까요. 공감은 심리적 산소라고 했는데 나 자신과 아이들에게 산소 공급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반복되는 공감의 실패와 복구가 안정된 ‘나’ 구조를 만든다
공감적 양육은 애착 형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공감적 양육을 할수록 안정 애착을 형성할 가능성도 높아지지요. 공감과 애착의 공통점은 잦은 균열 가운데도 복구되어갈 때 더 단단해지고 응집되어 간다는 겁니다.
애착손상을 주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착손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애착은 한번 깨지면 붙일 수 없는 유리그릇 같은 것이 아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오히려 더욱더 단단해지는 인간의 몸과 같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 인간에 가까운 휴머노이드가 개발되더라도 인간의 굳은살을 흉내 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소재의 회복력이 좋으면 원형 복구까지는 되겠지만, 인간의 손발처럼 다치고 찢어지는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해질 수는 없을 테니까. 애착은 그런 것이다. 한 번도 손상되지 않았기에 애착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깨지면서도 이를 다시 복구하고 연결시키기 때문에 단단해지는 것이다. 문요한 <관계를 읽는 시간>
그러니 공감이 잘 안될 때는 그냥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겼을 때 다시 공감해 줄 수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경험하면서 견딜 만한 좌절은 아이들에게 성장할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요.
오늘도 우리는 깨지고 복구하며 단단해 지는 중입니다.
회복탄력성도 많이 얘기들 하지요. 공감의 복구도 심리적인 원리는 동일합니다 . 공감이 ‘자기’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데 핵심적 재료가 되기 때문에 저는 회복보다는 ‘복구’라는 말을 써볼께요. 아이의 ‘나’가 무너지기 어려운 튼튼한 집 구조로 지어져 갑니다. 엄마의 공감 복구력으로 말입니다. 엄마의 ‘나’ 구조도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지지 않으려면 ‘나’ 자신에게 공감해 주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토록 소중하고 무거운 엄마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공감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니 오글거려도 나 자신의 감정에 공감해 주세요. 공감이 다시 엄마의 심장을 펄떡 거리게 할테니까요. 내가 나에게 공감해주기 어려울 때는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의 공감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생기 있는 엄마의 삶은 가족 전체에 긍정적 변화를 불러 일으킬 테니까요.
엄마, 당신은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참고문헌>
~~~<애착과 심리치료>
낸시 맥윌리암스 <정신분석적 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