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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심리적 산소가 맞다

목표: 자기대상의 공감 중요성 설명. 엄마가 ‘나’로서 얼마나 공감 받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 담기.
공감은 심리적 산소다
코헛은 자기대상인 엄마의 공감적 반응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심리적 재양육이라 볼 수 있는 상담 관계에서도 상담자의 공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지요. 오죽하면 공감은 심리적 산소라고 말했을까요.
여러분은 공감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각자가 생각하는 공감의 정의를 한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저는 여러 학자나 전문가들이 내어 놓은 공감의 정의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공감은 타인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인간적인 공명과 같은 것, 공감이 없다면 인간의 삶 자체가 유지될 수 없다 (Kohut, 1975)
진정한 공감이란 "자신의 존재 전체로 듣는 것“이다 (중국의 장자)
“상대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능력 “ -브레네브라운 <수치심 권하는 사회>
공감은 상대방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권경인 <엄마가 늘 여기 있을게>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다. 이 공급이 끊기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져간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공감은 인간에게 타고난 능력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좌절과 상처를 경험하면서 나를 보호하는 데 에너지가 집중되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도 훼손됩니다. 의도적으로 배우고 훈련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공감을 해주기가 점점 어려워지죠. 저는 아이를 키우고 상담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감이 어렵다고 느낍니다. 내가 공감했다고 느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이 공감 받았다고 느껴야 비로소 공감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담을 할수록 정확한 공감의 위력도 실감합니다. 공감으로 포장했지만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맥없는 공감이 아닌, 정확한 공감은 힘이 셉니다. 꺼져가는 사람의 마음에 불씨를 살릴 수 있을 만큼.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공감적 대화의 과녁은 언제나 ‘존재 자체’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정혜신 박사는 ‘정확한 공감’은 사람을 구하지만 과녁을 벗어난 공감은 대화를 지리멸렬하게 만들 뿐이라면서, 공감의 과녁은 ‘존재 자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그런 정확한 공감을 받아본 적이 있나요? 당신 존재 자체를 향한 공감. 당신의 타이틀, 역할, 성별, 학벌, 돈, 매력…그 무엇이 없어도 당신의 존재 자체를 최고로 인정하며, 그 존재가 취약해진 순간에도 기댈 수 있도록 허용 받는 그런 공감 말입니다.
<마주봄 질문>
당신은 어떤 공감을 오래 기억하고 있나요?
그리고 어떤 공감을 받을 때 다시 마음이 살아난다고 느끼나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은이 자신의 집 계단 앞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무한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던 장면, 기억 나시나요? 그 때 이지은이 듣던 음성은 이선균이 자신을 향해 “착하다”고 말한 그 한 마디였습니다. 부모가 사채업자에게 진 빚 때문에 평생을 사채업자에게 쫓겨 다녔던 이지은은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사채업자를 죽였습니다. 세상은 이지은은 ‘나쁘다’고 손가락질 했지만 이선균 만큼은 나의 ‘착함’을 알아봐주었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공감해 준 아저씨의 “착하다”는 한마디. 그 한 마디가 이지은의 얼어 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녹입니다. 존재를 향한 정확한 공감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런 공감은 꺼져 가고 시들어 가는 마음에 다시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줍니다.
공감 받지 못하면
산소 없이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실제로 산소가 부족하면 신경 세포는 4-5분이 지나면 죽고, 죽은 세포는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심폐 소생술로 사람을 다시 살리려면 호흡과 심장이 멈춘 뒤 4-5분 내에 심폐 소생술(CPR)에 들어가야 합니다. 정혜신 박사는 <당신이 옳다>에서 공감을 ‘심리적 CPR’로 비유하지요.
심리적 CPR(심폐소생술)이란 결국 그의 ‘나’가 위치한 바로 그곳을 정확히 찾아서 그 위에 장대비처럼 ‘공감’을 퍼붓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 힘의 근원은 ‘정확한 공감’이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사람의 마음은 ‘공감’ 없이 건강하게 발달할 수 없습니다. 코헛은 자기대상인 양육자가 공감적 반응으로 양육해야 아이의 자기애가 건강하게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아이의 감정이나 욕구에 양육자가 공감적으로 반응해 주지 않으면 아이는 좌절을 경험하고, 그 좌절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크거나 만성적으로 반복되면 아이의 성격 구조는 취약해집니다. 성격 ‘구조’라고 말하는 이유는 성격은 우리 마음의 ‘집’처럼 어린 시절부터 기초 공사가 되어 점점 나만의 스타일대로 완성되어 가는 구조물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양육자의 공감적 반응 없이는 기초 공사가 부실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구조가 부실하여 외부의 작은 공격에도 쉽게 허물어지지요. 자신을 말도 안되게 부풀리거나 작은 비난이나 좌절에도 쉽게 수치심을 느끼는 성격이 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수치심
공감적 양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엄마가 되었을 때 엄마들도 수치심을 자주 경험할 수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엄마에게 요구되는 암묵적 요구와 기대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여기면 수치감을 느끼고, 그 수치심이 발로가 되어 우울, 불안, 분노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죠. 엄마가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일을 하거나 지속적인 취미 생활을 하려 해도 아이들에게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엄마 자신 또는 그 주변의 가족들이 엄마 탓을 할 때 엄마들도 수치심을 자주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애가 강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그 엄마에겐 유아적인 자기애가 무의식에 그대로 남아있을 가능성 큽니다. 좋은 대상들을 경험했다면 성숙한 자기애로 변형되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엄마라고 하더라도 아이와의 관계에서 유아적인 자기애로 인한 수치심, 분노를 자주 경험합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수치스러운 부분을 지적하거나 조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심정을 알아주는 공감이 필요하지요.
아이와의 관계에서 수치심이나 분노를 자주 경험하나요?
그렇다면 나에겐 지금 어린 시절 결핍을 알아봐주고 공감 받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제서야 아이에게 진짜 공감을 건넬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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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 임상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서 ‘수치심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면서 공감이 수치심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말합니다. 직장에서 무척 바쁘게 지내고 있던 브라운은 어느 날 아이들의 유치원 행사에 참여합니다. 행사 당일까지 눈코 뜰새 없이 바빴지만 가까스로 행사에 참여한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야 자신이 담당하기로 한 행사의 다과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주변에 있던 다른 엄마가 준비해 온 다과의 일부를 자신이 준비해 온 것처럼 가져와 셋팅을 한 사실을 고백하며 그런 자신이 무척 수치스러웠음을 고백합니다. 그 때 자신을 수치감에서 구해준 한 사람은 친구의 공감. “~~~~~~~~~~~~~~~~”
엄마도 ‘나’에 대한 공감이 먼저다
우리는 엄마입니다. 어린 시절 아무리 내가 공감적인 양육을 못 받고 자랐다고 느꼈어도 이젠 아이를 공감적으로 양육해야 하는 엄마의 역할이 부여되었습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자녀에게 공감도 못해주는 나는 나쁜 엄마라는 생각이 들 때, 생각해 보세요.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이 어려운 일에 내가 도전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 노력을 시도하는 나를 토닥이고 격려해 주세요. 공감의 실패에도 공감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내 안에 담겨 있는 공감의 에너지가 가득해야 다른 이에게 공감을 자연스럽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엄마라도 자녀에게 공감하기 어렵다면 엄마부터 공감을 받아야 합니다. 엄마 이전에 우린 모두 ‘나’였습니다. 그러니 ‘나’에 대한 공감이 먼저죠. 아이에게 공감하기 어렵다면, 공감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나’부터 공감해 주세요. 그 공감도 어렵다면 나를 공감해줄 수 있는 안전한 대상에게 공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배우자, 친구, 멘토, 상담자…누구든 나의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고 공감해 줄 안전한 대상이면 됩니다. 먼저 ‘나’부터 공감 받으세요. 그리고 ‘나’부터 공감하면 ‘너’에게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공감의 실천은 먼저 가장 중요한 관계, 즉 '자신'과의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에게 공감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다. 자신에게 가혹하고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럴 의지가 없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힘들다. 실수했을 때 '난 정말 바보야,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라며 스스로를 나무라는 사람은 자녀나 배우자가 실수했을 때도 똑같은 감정을 전한다. 진정으로 공감하고 유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먼저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브레네 브라운 <수치심 권하는 사회>
<각주 달기>
코헛은 자기심리학적인 치료방법으로 공감 자체는 환자의 정보를 얻고 이해하는 도구이지, 직접 치료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최영민, 쉽게 쓴 자기심리학). 필자는 자기심리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공감’의 효과를 코헛보다는 더 강조해서 서술했습니다. 본서의 ‘공감’에 대한 입장은 정혜신 박사의 <당신은 옳다>와 유사합니다.
생각해 보기)
나는 나 자신에게 공감하고 있나요?
엄마로서 겪는 어려움에 공감해 주는 대상을 떠올려 보세요. 지금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공감 대상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